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기 주코프 (문단 편집) ==== 중앙에서 쫓겨나다 ==== [[파일:external/img.blogin.com/blogin_00344328_158877431.jpg]] ▲ 1945년 6월 5일 [[프랑크푸르트]]에서 열린 승전 축하 집회에 참가한 [[연합군]] 수뇌부와 주코프. [[드와이트 아이젠하워]]와 [[버나드 로 몽고메리]]가 보인다. [[파일:attachment/450px-Zhukov_1945_E010750410-v8.jpg]] ▲ 1945년 7월 12일 [[베를린]] [[브란덴부르크 문]]에서 영국군 수뇌부와 인사를 나누는 소련군 수뇌부. 가운데 있는 소련군 장군이 주코프. 오른쪽에 키 큰 장군은 로코솝스키이며, [[베레모]]를 쓰고 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장군은 몽고메리 원수.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코프의 위상은 독소전쟁 이후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. 1944년 7월과 1945년 6월에 각각 소련영웅 칭호를 추가 수상해 그 당시 유일한 3중 영웅이 되었고, 찬가 '주코프 원수의 승리'가 작곡되는 등 소련 전체가 그를 영웅으로 받들었다. 하지만 주코프는 공식 석상에서 '''스탈린은 한 거 없고, 실은 내가 다 했다'''는 발언을 할 정도로 도가 지나친 자기 과시를 보여주었고, 이는 당연히 스탈린의 의심을 부추길 만했다. 주코프의 이러한 자화자찬은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을 위해 [[독일]]에 파견된, 대숙청 당시 수석 검사였던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Andrey_Vyshinsky|안드레이 비신스키]]의 귀에 들어갔고, 비신스키는 이를 [[고자질|스탈린에게 일러바쳤다.]] 스탈린은 주코프의 자만에 분노해 [[NKVD]]의 수장 [[라브렌티 베리야]]에게 그의 비리 혐의에 대해 수사하도록 했고, NKVD는 주코프의 [[아파트]]를 샅샅히 뒤졌다. 결국 주코프는 베를린에서 온갖 귀금속을 약탈해서 빼돌렸다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혐의로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. 베리야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주코프의 혐의를 매우 과장하여 보고했고,[* 다만 과장되었을 뿐이지, 주코프가 베를린에서 귀금속을 약탈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. 이것이야말로 주코프의 진정한 흑역사.] 공군 사령관 [[알렉산드르 노비코프]]를 고문해 주코프가 반역을 꾀했다는 자백을 추가했다. 위기의 순간에서 주코프는 스탈린 앞에서 변명 대신 [[자아비판]]을 하고 참회하는 척했다. 그리고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, 이 명장을 [[굴라크]]에 보내는 대신 좌천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. 1947년 2월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도 도로 빼앗겼다. 스탈린의 의심과 베리야의 농간 때문에 주코프뿐만 아니라 독소전쟁에 큰 공을 세웠던 공군 원수 노비코프와 해군 원수 [[니콜라이 쿠즈네초프]]도 반역 및 근무 불성실 혐의로 기소되었다. 노비코프는 15년 징역형을 받은 뒤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으며, 쿠즈네초프는 감옥은 가지 않았지만 중장으로 강등되었다. [[그리고리 쿨리크]]를 이러한 전후 공신 숙청에 추가하는 사람도 있으나, 쿨리크는 독소전쟁에서 [[기관단총]], [[지뢰]], [[T-34-76|T-34]]를 쓸모없다 여겨 생산에 제동을 거는 등 사고만 저지른 데다가 전화로 스탈린을 [[뒷담]]하다가 걸렸기 때문에 비록 죄목 자체는 터무니없긴 해도 소련에서는 얄짤없는 사형감이었다. 사실 쿨리크를 제외하면 이러한 전후 군인 숙청에서 처형된 "네임드 인사"는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